2014년 영양사시험 체험수기 우수상 김윤미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은 ‘2013년도 하반기 및 14년도 상반기 보건의료인국가시험 체험수기 공모전’ 심사결과를 발표하고 최근 수기집을 펴냈다. 이번 수기 공모전에 영양사 당선자는 △우수상 김윤미, 양승기 △장려상 김지혜 등 3명. 급식뉴스가 이들 3명의 수기를 차례로 올린다. [편집자]

“삼세번 그리고 선물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삼세번이라고, 이번까지만 하고 이번에도 불합격하면 미련 없이 영양사 공부를 그만 둘 것이라고 다짐에 다짐을 하며 각고의 노력을 하였다!

불혹이 넘은 45세의 나이에, 고3짜리 딸과 그 밑으로 동생을 둘이나 더 둔 세 아이의 엄마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가정학과에 입학하였고 나의 ‘영양사 국가시험 취득’ 인생스토리가 시작되었다.

평소에 건강에 관심이 많았고, 100세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서 건강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면 좋겠지만 유병장수라는 말처럼 병과 함께 살아가야하는 시대를 살고 있음을 통감하며 임상영양사를 목표로 열심히 학업에 매진하였다. 퇴근하여 늦은 시간에 식탁에 앉아 공부하는 내게 남편은 “시험만을 보기위한 공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조언을 해주었건만 그야말로 시험에 통과하기 위한 공부만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학교 강의 특성상 거의 컴맹수준이던 내게는 매우 어려웠던 대학생활이었지만 힘든 일 참아주며 감싸주던 가족의 도움으로 4년 만에 무사히 학업을 마치게 되었다. 졸업하던 해 제35회 영양사 시험에 불합격했다는 통지를 졸업식장에서 받았다.

첫 번째 응시했던 영양사시험은 “어떤 것인지 간이나 본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응시하긴 했지만 역시 쓴맛을 보게 되었다. ‘남들은 1달 공부하면 철떡 붙는다 하던데, 아무리 학교 공부만 했기로서니 어찌 이리도 운이 없나’하는 생각과 ‘아니야, 이렇게 공부도 안하고 합격하면 기존 영양사님들을 내가 얼마나 무시하고 우습게보겠나?’하는 생각과 함께 이 어려운 난관을 헤치고 이겨낸 선배님들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시험문제가 준비할 때 풀었던 문제집들보다는 의외로 어렵지 않게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비록 이번에는 불합격했지만 다음에는 합격할 수 있다는 강한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다음 시험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새로운 다짐으로 또 다른 문제집을 선택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몸담고 있는 회사는 24시간 일하는 곳이라 생활주기도 맞지 않고 공부하기도 불편하여 힘들어 하던 중 주말 근무 조건이 안정적인 부서에서 인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사내 게시판에 올랐다. ‘공부하라고 하늘이 내린 기회’라는 생각으로 무조건 신청을 하였는데 모든 사람이 같은 입장인지라 너무 많은 지원자가 몰린 바람에 윗분들의 회의 결과 우수한 사원에게 기회를 주자는 의견일치로 우선적으로 선정이 되어 두어 달 호사를 누리며 공부를 했다. ‘내게 이런 행운이 그냥 찾아올 리가 없는데’하는 생각을 할 즈음, 마치 머피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순식간에 일이 꼬이기 시작하더니 우리 부서만 서울본부로 이전을 하게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30분이면 충분하던 직장을 놔두고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으로 출근을 해야 한다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가서 자리 잡히면 순차적으로 다시 기존에 있던 곳으로 보내준다”는 책임자의 말만 믿고 서울로 옮겨갔는데 그때부터 수난은 시작되었다. 공부는커녕 하루 5시간 정도 되는 통근시간과 업무 폭주로 밤 12시를 넘겨 퇴근하는 날이 속출하면서 휴일이 되면 밀린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쉬지 못해 쌓인 피로와 그동안 못 잔 잠을 자느라 이틀을 허비하고 나면 마지막 남은 일요일 밤이 아쉽기만 하고 내일이면 밝아 올 월요일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이렇게 힘겨운 서울살이를 하는 동안 옆자리 동료의 갑작스런 사망과 그 동료의 빈자리를 메워야 하는 업무량 증가로 기존 사무실로 복귀시켜준다는 회사의 약속은 기약 없이 미루어졌고 영양사의 꿈은 점점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결국, 이번에도 또 겨우 한 달 어렵사리 공부하고 36회 영양사 시험을 치루게 되었다.

시험장

또 기회가 된다면 인생과 건강에 대해 강연 등을 통해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는 김윤미씨.
책상위에 있던 학원 문제지를 봤을 때 정말 눈앞이 하얘졌다. 그 많은 문제 중에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실제 시험문제를 풀 때도 백짓장처럼 하얘진 머리로 시험을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겠다. 문제를 푸는 게 아니라 읽는데 만도 시간이 부족하였던 나와는 달리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문제를 다 풀고 엎드려 종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쉬는 시간에 관련 학원 학생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하는 이야기가 “학원 쌤이 그러는데 ‘앞으로 학원 안다니는 사람은 영양사 시험에 못 붙을 거라’했다”며 은근 학원이 필수인양 선전을 하고 있었다. 그 후 ‘제36회 영양사 시험에 불합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남편이 용기를 주며 다시 공부하도록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첫 번 불합격 때 가졌던 기존 영양사님들에 대한 존경심이 이제는 경외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한편 5월이 다 가도록 원래 사무실로의 복귀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눈물을 머금고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아직 37회 대비용 문제집도 나오지 않은 상태라 학원을 갈건지에 대해 아주 잠깐 고민을 했었지만 학교 교과서로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토시하나 빼지 않고 정독하고 중요한 부분은 반드시 메모하며 공부하였다.

‘책에 정답이 있었구나. 이걸 진작 정독을 했으면 뭘 공부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 할 때 큰 힘이 되었을 텐데. 아~ 정말 아깝네! 이렇게 쉬운 걸 내가 왜 틀렸을까?’ 6점 모자라 불합격 되었던 36회 때 나온 문제가 교과서에 다 있었다. 무릎을 치고 후회해도 이미 늦은 때였지만. 12월 말까지 교과서 10권을 중요부분을 필기해가며 정독으로 2번을 읽었다(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포기한 과목도 물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1월 한 달 동안에는 총정리 하면서 마지막 문제풀이를 하려고 계획을 짜 놓았다. 문제풀이 책도 최종판으로 사려고 미루어 둔 상태였다.

‘어떻게 이렇게도 계획한 대로 차질 없이 척척 진행되어갈까?’하는 호강에 겨운 생각을 할 때 쯤 그야말로 청천병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제 74세이신 친정어머니가 위암말기 라는 기막힌 소식! 언니, 동생들과 번갈아 가며 병상을 지키고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건질세라 검사에 검사를 하느라 정신없이 1월이 다 가버렸다.

아픈 고통의 와중에 제대로 잠도 못 이루시는 어머니가 잠깐이나마 눈 붙이시는 틈을 타 공부하던 그 순간순간에 무엇을 공부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2번 시험 보는 동안 어머니께는 말씀을 안 드렸었다. 결과 발표 날 때까지 애타하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냥 붙고 나서 말씀드리는 게 편하게 해드리는 거 같아서 미루었던 것이다.

어느 날 동생이 “어머니말씀이 언니가 왜 그렇게 병원을 자주 안 오냐”고 하셔서 “언니 2월 9일에 영양사 시험 보고 올 거니까 보고 싶어도 그때까지만 참고 계시라.”했단다. 슬하에 자식이 많아 항상 걱정 많으신 어머니께 부담을 안겨 드린 것 같아 죄송스럽고, 이제 어머니까지 아셨으니 기필코 합격하여 비록 병상에 누워계시지만 합격의 기쁨을 전하리라는 각오로 눈물의 학업에 매진했다.

그 와중에도 어머니의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아 달려가기를 3번. 마지막에 연락 받고 갔을 때는 1인실에 계셨는데 거기에는 이미 장례절차 안내문이 준비 되어 있었다. 정신 줄 놓고 넋이 나가있는 나에게 대학교수이신 작은 형부께서 집으로 가라고 야단을 하신다. “시험보고 오라고. 혹시 그 전에 돌아가셔도 연락 안 할 테니 그리 알라고.” 어머니께 “시험 합격하고 올 테니까 잘 견디고 계시라”는 눈물의 인사를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이틀을 더 견디시고 2월8일 토요일 오전 10시 넘어 운명을 하셨다. 물론 가족들은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연락을 받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신랑이 집을 나섰다. 나만 홀로 집에 남겨둔 채로... 나의 하늘이 무너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가실 줄이야. 이렇게 허무하게 마지막 한 달이 증발 할 줄이야…….

‘마지막 총정리도 못하고 문제집도 아직 못 사서 문제풀이도 하나도 못 했는데 무슨 시험을 보겠는가? 시험은 내년에 볼 수도 있는 건데 포기할까? 아무도 연락도 안 해주는 거보면 시험을 보고 오라는 소리인데.’ 너무 많은 생각과 ‘이제는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안 계시는 고아?’라는 생각에 무섭고 서러워서 밤새 잠도 못자고 한없이 울었다. ‘이렇게 빨리 가실 줄 알았다면 어머니 옆에나 계속 있어드릴걸.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켜드릴걸’하는 후회에 울고 ‘이제는 영영 어머니를 볼 수 없다’는 슬픔에 울고... 어머니 가시는 마지막 길에 오셨던 많은 분들이 나의 부재로 울며 시험 치른 이 사연을 아시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장례식장에서 신랑이 시험장까지 태워다 준다고 서둘러 집엘 왔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시험 보러 못 갔을 거다.
첫 교시 첫 번째 문제부터 그 마지막 문제까지 알고 푼 문제가 하나도 없는 거 같았다. 영양학 60문제를 푸는 동안 문제도 안 읽혀지고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녀의 죄스런 마음으로 내내 울면서 시험을 보았다. 1교시 끝났을 때 시험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과 함께 2,3교시 시험을 계속 본 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시험장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제일 존경하던 의지의 한국인인 나의 어머니께서 원하는 모습은 아니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끝까지 시험을 치렀다. 어려운 문제는 쉽게 포기하고 연필 굴려 답을 찍던 예전의 모습이 아닌, ‘그 쉬운 문제를 왜 이렇게 어려운 문제로 내셨을까?’하는 생각과 ‘한 문제로 당락이 결정 된다’는 생각으로 좀 더 신중하게 한 문제 한 문제 임했다.

그리고 정신없는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 보내드리느라 고생했다고, 봄 방학 다가기 전에 식구들 모두 모여 점심이나 먹자고 모인 어느 날, 생각지도 못한 문자가 날아왔다.

<07012653김윤미>님은 제37회 영양사 국가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국시원-

이 얼마나 꿈에도 그리던 소식이던가? 못 미더워 읽고 또 읽고, 잘못 읽었나 싶어 옆에 있는 동생한테 확인 받고서야 믿어졌다. 발표 날이 이틀이나 남아 있었는데 식구들 모두 모여 있는 줄 어찌 알고 오늘 연락을 줬는지. 혹시나 문자가 잘못 갔다는 사과 문자와 함께 불합격 문자가 28일에 다시 올까봐서 애간장을 녹이며 이틀을 더 기다렸다.

엄마께 감사하다는 인사가 절로 나왔다. 마지막 다녀온 날 이후 이틀을 버텨주셨으니 그나마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만약 하루 후에 돌아가셨으면 시험 날이 장례 날이니 시험조차 못 봤을 것이다. 사경을 헤매면서도 사랑하는 딸을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견디고 계셨을 어머니의 갚을 길 없이 크신 사랑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머니도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실 것이다.

어머니가 영양사 합격을 마지막 선물로 주고 가신 거 같아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초심을 기억하며 항상 노력하는 훌륭한 영양사로 성장하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

나의 긴 여정을 말없이 지켜봐주시고 기다려주신 가족 친지 분들과 친구, 이웃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 번 더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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